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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동쪽에 있는 9기의 조선왕릉, 동구릉(東九陵)

by kangdante 2025.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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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자리한 동구릉(東九陵)1408(태종 8)에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 터로 쓰이기 시작한 뒤로부터 조선시대 일대를 통해 족분(族墳)을 이루고 있으며,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王陵群)이다.

 

동구릉(東九陵)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을 시작으로 문종(文宗)의 현릉(顯陵), 선조(宣祖)의 목릉(穆陵), 현종(顯宗) 숭릉(崇陵), 장렬왕후(莊烈王后) 휘릉(徽陵), 단의왕후(端懿王后) 혜릉(惠陵), 영조(英祖) 원릉(英祖), 헌종(憲宗)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으며 당시 능의 개수에 따라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불리다 1855년 문조(文祖)의 수릉(綏陵)이 옮겨오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고 한다.

 

동구릉의 재실(齋室)

 

 

수릉(綏陵)은 조선 23대 순조의 맏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 왕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와 비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의 능이며,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동구릉 중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능이기도 하다.

 

수릉은 추존왕 덕종과 세자빈 소혜왕후 한씨의 경릉과 유이하게 정자각 기준으로 왕비가 더 높은 자리인 왼쪽에 안장된 조선 왕릉이며, 수릉은 합장릉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알 수 없으나 신도비에서 신정왕후의 시호 뒤에 부좌(祔左)가 아닌 부우(祔右)가 새겨진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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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文祖)는 조선 후기의 예악(禮樂)을 정비하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나 22세로 세상을 떠나 시효를 효명세자라 하였으며,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다시 1899년에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현릉(顯陵)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 씨의 능이며, 원래는 영릉(英陵) 우강(右岡)에 정하였으나, 이곳은 물이 나고 돌이 나와 현 위치인 건원릉(健元陵) 동강(東岡)을 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릉은 홍살문부터 정자각비각 등 부속 시설은 하나만 만들고 정자각 뒤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따로 조성했으므로 동원이강 형식이라 부르며, 현릉에서는 홍살문 앞에 참도와 배위가 있으며 이런 형식은 조선 시대의 왕릉에서 유일하다.

 

 

문종(文宗)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현왕후이며, 1421(세종 3)8세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막상 왕위에 오른 것은 145037세 때였다.

 

 

건원릉(健元陵)은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기본적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정례가 되며,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중앙에 위치하는데 조선 왕의 능호는 모두 외자인 데 반해 견원릉만 두 자다

 

다른 왕릉이 단정하게 벌초가 되어 있으나 건원릉은 특이하게 억새풀이 무성한 투박한 왕릉이며, 벌초도 1년에 한식에 딱 한 번만 한다고 한다.

 

 

휘릉(徽陵)16대 인조의 두 번째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며, 능침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자묘 등 12()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석상(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鼓石)5개를 배치하였으며, 이는 조선 전기 태조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이라고 하며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翼廊)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는 드라마 꽃들의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여인으로 조선 후기 현종~숙종 시대에 상복을 몇 년간 입느냐의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로써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원릉(元陵)은 제21대 왕 영조(英祖)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이며,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능이고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옛 영릉(寧陵) 자리였으나 영릉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겨 계속 보수를 하다가 1673(현종 14)에 여주로 옮기면서 터만 남아있었다가 1776(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옛 영릉 자리에 원릉(元陵)이 조성되었다.

 

 

휘릉~원릉 숲길은 휘릉과 원릉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총길이가 1.4숲길이며, 떼죽나무 숲길이라고도 불리며 새하얀 떼죽나무 꽃이 곳곳에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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