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과 인현왕후ㆍ인원왕후의 명릉(明陵),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자리한 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구리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실의 왕릉군이다.
서오릉에는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ㆍ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陵)인 명릉(明陵)을 비롯하여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익릉(翼陵), 그리고 영조의 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능인 홍릉(弘陵) 등 5개의 왕릉이 있다.
서오릉은 1457년(세조 3년)에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의묘(懿墓, 경릉)가 처음으로 조성되었고, 1470년(성종 1년)에는 예종의 창릉(昌陵)이 왕릉으로서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순회세자의 순창원(順昌園),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숙종의 명릉(明陵), 정성왕후의 홍릉( 弘陵) 등이 차례로 조성되어 조선시대에는 5기의 능과 1기의 원이 조성되었으며, 1970년대에 영빈 이씨의 수경원(綏慶園)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옮겨져 지금의 서오릉이 되었다
명릉(明陵)은 숙종(肅宗)과 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 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능으로,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雙陵)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명릉의 특징은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하였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줄였고, 종래의 8각의 장명등 옥개(屋蓋)를 4각형으로 제도화하였다.
숙종은 1661년(현종 2년)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의 원자로 태어나 1667년(현종 8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세인 1674년 8월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숙종은 대동법 실시 및 임진ㆍ병자 양난 이후의 토지개혁 종결, 화폐 통용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하였고, 1712년 백두산정계비의 건립으로 국경선을 확정시켰다.
인현왕후 민씨는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의 딸로 1667년(현종 8년)에 태어나 1681년(숙종 7년)에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경종의 책봉 문제로 폐위되어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다가 복위하였다.
인현왕후는 소생 없이 1701년(숙종 27년)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질병으로 35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곳에 장례를 하고 오른쪽을 비워두어 숙종의 능 자리를 남겨두었다가 숙종의 장례를 치르고 능의 이름을 명릉으로 정하였다.
인원왕후 김씨는 경은부원군 주신(柱臣)의 딸로 1687년(숙종 13년)에 태어나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간택되어 1702년(숙종 28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원왕후는 소생 없이 1757년(영조 33년)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 놓았으나 따로 정자각을 세우자면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해야 하므로 명릉과 한 정자각에서 제사를 받게 하였다.
익릉(翼陵)은 서오릉의 여러 능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숙종의 첫 번째 원비(元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단릉(單陵)이며,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쫓고 있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만기(萬基)의 딸로 1661년(현종 2년)에 태어나 열 살 때 세자빈에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1680년(숙종 6년)에 천연두 증세를 보인 뒤 발병 8일 만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이듬해 2월에 이곳에 장례 하였다.
경릉(敬陵)은 의경세자(懿敬世子, 추존왕 덕종)와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으로, 봉분에는 병풍석ㆍ난간석ㆍ무인석ㆍ석수(石獸) 등이 없는데 비해 소혜왕후의 능은 왕비로 생전에 책봉되었으므로 왕릉 형식을 갖추어 난간석을 두르고, 문ㆍ무인석과 망주석ㆍ장명등ㆍ8마리의 석호ㆍ석양이 서 있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1438년(세종 20년)에 태어나 세조 즉위년(145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병약하여 20세인 1457년(세조 3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1437년(세종 19년)에 태어나 1455년(세조 즉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1471년(성종 2년)에 의경세자를 의경왕으로 높이자 왕후가 되었고 덕종의 추존과 함께 왕대비가 되었다.
재실(齋室)은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참봉(參奉) 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시설로는 재실 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그 밖에 행랑채 등이 있으며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서오릉에는 현재 명릉 재실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