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권력의 무상과 연민에 대한 영화, 왕의 남자
영화 ‘왕의 남자’는 절대 권력자지만 기득권을 가진 중신(重臣)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왕과 천민 신분이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광대를 통해 자유의 의미를 한번쯤은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 ‘왕의 남자’는 희곡 ‘이(爾)’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희곡이나 소설ㆍ웹툰 등으로 검증을 받은 작품들은 예전의 영화에서 그러하듯 흥행에 성공하는 것 같다.
남사당패의 광대 장생(감우성)은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인 공길(이준기)을 술시중 들게 하는 우두머리와 다투다 실수로 그를 죽이게 되자 한양으로 도피를 하게 되며, 안양에 온 장생은 또 다른 광대 패에게 걸쭉한 솜씨를 보이며 그들과 합류하게 된다.
광대놀이패와 합류한 장생은 나날이 줄어드는 수입에 견디다 못해 연산군(정진영)과 장녹수(강성연)의 애정행각을 풍자하는 큰 놀이판을 제안하고, 이들 놀이판은 그 후 한양의 명물 공연으로 대성황을 이루지만 그들은 왕을 희롱한 죄로 의금부로 끌려가게 된다.
의금부에서 곤장 태형(笞刑)에 견디다 못한 장생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 보이겠소!”
“왕께서 보고도 웃지 않으시면 네놈들의 목을 칠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적 실존 인물인 연산군(燕山君)과 그의 애첩인 장녹수를 바탕으로, 두 눈을 잃어가면서까지 신명나는 놀이판 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유의 상징인 광대 장생이라는 허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한 픽션 영화이다.
광대 공길 캐릭터는 특히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 는 말을 왕에게 하였다가 참형을 당했다는 ‘연산군 일기’의 짧은 기록을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탄생시킨 인물이라고 한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나 익살 넘치는 광대들의 화려한 재주, 그리고 그들이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나는 풍자와 해학이 아니라 아마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망한 권력의 무상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대놀이패가 연산군과 장녹수 앞에서 막상 공연을 시작하자 모든 광대들이 긴장하여 제대로 놀지를 못하고 급기야 장생 역시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갖은 노력을 해보지만 왕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공길은 특유의 여자 목소리로 허리를 드러낸 채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는 모습을 선보이자 왕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파안대소한다. 이들의 공연에 흡족한 왕은 광대들의 거처로 궁내 희락원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들 광대들은 권력자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며 급기야 중신들의 비리를 풍자하는 공연을 선보임으로써 왕의 신임을 더욱 더 받게 되지만 이에 반발한 중신들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이들 광대를 쫓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공길에 대한 왕의 총애가 깊어지자 왕의 관심을 공길에게 빼앗겼다는 질투심에 휩싸인 장녹수 역시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은밀한 계략을 꾸미게 된다.
이에 아랑곳없이 장생 일행은 권력자들의 암투로 인해 선왕이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경극을 선보이자, 연산군은 그 자리에서 선왕의 여자들을 칼로 베어 죽여 버린다. 왕의 광기에 실망한 장생은 궁을 떠나겠다고 하지만 왕은 공길을 놓아주지 않고 끝내 장생은 두 눈을 잃게 된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중신(重臣)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왕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중신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왕과의 힘겨루기에서 보듯, 결국 권력은 권력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권력의 양면성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뼈아프게 느끼게 한다.
절대 권력자는 광대놀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려 하고, 또 다른 기득권 세력은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권력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권력의 무상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으며 마치 신기루를 쫓아가듯 권력을 쫓아 헤매는 그들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백미(白眉)는 뭐니 뭐니 해도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의 장국영을 연상시키는 공길 캐릭터 연기라 할 수 있다. 여성 광대로 분장한 공길이 짙은 화장을 하고 허리를 드러낸 채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는 모습에서 여자로서의 요염함과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캐릭터는 연산군이다. 그는 침실에서 장녹수와 자신의 성적 관계를 풍자하는 광대놀이를 스스로 해 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하고, 중신들의 매관매직 및 성상납 등을 풍자하는 광대놀음을 보고는 비리를 저지른 대신의 손가락을 잔인하게 자르기도 한다.
또한 모친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시는 경극을 본 후에는 선왕의 여자들을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포악한 연산의 모습에서 절대 권력자지만 마음의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채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고독함과 폭력성, 그리고 슬픔을 동시에 지닌 광대 같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으로서의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