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숲길이 있는 조선왕릉 삼릉공원, 선정릉(宣靖陵)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정릉(宣靖陵)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 및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모신 선릉(宣陵)과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을 모신 정릉(靖陵)이 자리하고 있다.
선정릉은 왕릉이 세 개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三陵公園)으로 불리기도 하며, 약 7만여 평의 면적에 송림과 잡목이 들어 서 있으며 사적 1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을 모신 왕릉으로, 중종은 원래 서삼릉 내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묻힌 곳에 합장하였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중종을 현 위치로 천장(遷葬)하였다.
정릉의 시설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준했으므로 선릉과 비슷하며, 구름무늬의 12지(支) 신상(神像)이 새겨진 병풍석을 돌리고 있으며, 정릉에 세워진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선릉과 거의 비슷하여 안면이 약간 두툼해 보이고, 양어깨가 풍성하게 보이지만 목은 그대로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다.
정릉에 세워진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선릉과 거의 비슷하여 안면이 약간 두툼해 보이고, 양어깨가 풍성하게 보이지만 목은 그대로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며 체구와 비교하면 얼굴은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었다.
몸 전체는 각주(角柱)에다 조각을 조금 가한 것 같이 보이며, 홀(笏)을 쥐고 있는 양손이 일직선으로 되어있어 포(袍)의 입체감을 전혀 나타내지 않은 도식화한 의습(衣褶)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곳으로 천장한 7년 뒤에 권력을 장악한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는 풍수상 수파(水破)가 불길한 자리에 선왕을 모실 수 없다 하여 문정왕후가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천장한 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능을 천장하고 난 후에 이곳의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齋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補土)하기에 큰 비용을 들였으므로 능 터를 다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결국 문정왕후는 현재의 태릉(泰陵)에 혼자 단릉(單陵)으로 장례를 지내게 되었다.
선릉(宣陵)은 성종(成宗)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모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정자각 건너 멀리 보이는 봉분이 성종의 능이고, 동쪽 언덕에 있는 봉분이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성종의 능은 석실을 만들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능은 병풍석도 만들지 않았으며, 선릉에 세워진 석인(石人)의 얼굴은 사실적이나 몸은 기둥 같고 얼굴이 몸과 비교하면 커져서 퇴화한 양식을 보이며, 문인석의 신장은 3m 내외로 정릉의 크기와 비슷하다.
성종(成宗)은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며, 성종은 13세에 즉위하여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대비(貞憙大妃)의 수렴청정을 거쳐 20세가 된 1476년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성종은 엄격한 배불정책(排佛政策)을 펴는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1475년에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였다.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서 1473년(성종 4년)에 선입대내(選入大內)하여 1480년(성종 1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1530년(중종 25년)에 69세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