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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11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 정릉(貞陵)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이면서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능(陵)이다. 정릉은 1409년(태종 9년)에 처음 조성한 후 1669년(현종 10년)에 다시 조성한 단릉 형식이며 능침에는 문석인ㆍ석마ㆍ장명등ㆍ혼유석ㆍ망주석ㆍ석양ㆍ석호를 배치하였다. 정릉은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으며, 능침아래에는 홍살문ㆍ정자각ㆍ수복방ㆍ수라간ㆍ비각 등이 있다. 정릉의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으며,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1396년(태.. 2023. 1. 18.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자리한 건릉(健陵)은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동릉이실(同陵異室) 합장릉이며, 병풍석 없이 난간만 두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융릉(隆陵)의 예를 따랐다. 건릉은 원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현릉원 동쪽에 능을 조성하였던 것을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고 하여 1821년에 현재의 위치에 이장하여 효의왕후를 합장하였다. 건릉은 합장릉이지만 혼유석(魂遊石) 1좌만 놓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세웠으며, 문무석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 19세기 능석물제도(陵石物制度)의 새로운 표본을 세웠다고 한다. 건릉은 동ㆍ서ㆍ북 3면에 곡장(曲墻)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석물은 난간석 바깥으로 석호와 석양을 각각 4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위하고 .. 2022. 9. 14.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쌍릉(雙陵), 장릉(章陵)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위치한 장릉(章陵)은 사후 왕으로 추존된 원종(元宗)과 그의 비(妃)인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모신 쌍릉(雙陵)이며 사적 제202호이다. 조선 왕릉에는 장릉이 세 곳이 있으며, 김포의 장릉(章陵)과 더불어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그리고 인조(仁祖)와 왕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파주 장릉(長陵) 등이 있다. 원종(元宗)은 선조(宣祖)의 다섯째 아들이며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으로, 1619년 사망할 때는 군(君)의 신분이었으므로 남양주시 금곡동의 처갓집 선산에 초라하게 묻혀 있었다. 이후 아들 능양군(인조)이 왕이 되자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묘도 원(園)으로 추승 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고 이후 원종의 무덤은 현재의 자리인 김포시로 옮.. 2022. 7. 7.
고종(高宗)과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자리한 홍릉(洪陵)은 고종(高宗)과 그의 비(妃)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이며, 옆에 있는 유릉(裕陵)과 합칭(合稱)하여 홍유릉(洪裕陵)이라 불리며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고종은 1919년에 홍릉(洪陵)에 초장 봉릉(初葬 封陵)되었으며, 명성황후는 1895년에 청량리 홍릉(현재 숭인원)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에 현재의 홍릉으로 이장하여 합장(合葬)한 동봉이강릉(同封異岡陵)이다. 홍릉의 특징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선포되고 왕이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 조성도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구조물을 대폭 확장하였으며, 종래의 정자각 대신 '一'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침의 호석(護石)인 양석(羊石)ㆍ호석(虎石) 대신 능침 앞에.. 2021. 7. 22.
단종(端宗)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자리한 사릉(思陵)은 조선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陵)으로,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 하여 능의 이름을 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사릉은 대군부인(大君夫人)의 예로 장사지낸 뒤 나중에 왕후의 능으로 추봉(追封)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조촐하며,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져 있어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사릉은 현재 오는 2021. 8. 13까지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공사를 실시하고 있어서 주변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이기도 하다. 사릉의 정자각(丁字閣)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이 짧아 전체 건물모습이 정사각형이라는 느낌이며, 다른 왕릉은 홍살문에서 참도(參道)를 통해 정자각으로 들어가지만 이곳 참도는 정자각까.. 2021. 4. 30.
산책하기 좋은 왕의 숲길과 영릉 재실(寧陵 齋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자리하고 있으며,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능(陵) 사이에는 ‘왕의 숲길’이라는 이름으로 산책하기 좋은 숲길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능에는 각각의 재실(齋室)이 자리하고 있다.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과 효종의 영릉을 연결하는 숲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에 숙종, 1730년에 영조, 1779년에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왕의 숲길 거리는 약 700m이며 도보로 약 15여분 걸리는 거리로 소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어 겨울분위기지만 나름 운치 있는 숲길이며, 개방시간은 .. 2020. 12. 10.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과 재실(齋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하고 있는 영릉(英陵)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능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合葬陵)이며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 둘렀으며 혼유석(魂遊石) 2개를 배치하였다. 영릉의 지세는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으로 조선 왕릉 중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하며, 원래는 헌릉(獻陵)에 있었던 것을 1469년(예종 1년)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였다고 한다. 세종(世宗)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에 왕위에 올라 32년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ㆍ측우기 등 과학기구 발명 등 정치ㆍ경제ㆍ문화ㆍ과학ㆍ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공비(.. 2020. 12. 7.
7일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능, 온릉(溫陵)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자리한 온릉(溫陵)은 비운의 7일 왕비였던 중종(中宗)의 첫 번째 비(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陵)이다. 인왕산의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인 단경왕후는 진성대군의 부인으로 1506년 중종반정으로 중종으로 등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7일 만에 폐출되었다가 1739년(영조15년)에 복위되었다. 온릉은 능 뒤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능 안에 석양(石羊)ㆍ석호(石虎)로 호위하였으며, 병석(庰石)과 난간이 없는 원분(圓墳) 앞에 혼유석(魂遊石)을 놓고 양쪽 끝에 망주(望柱)를 세우고, 중앙에 사각옥형의 장명등을 세우고 양쪽에 문석(文石)과 석마(石馬)를 배치하였다.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에 진성대군과 결혼하여 부부인(府.. 2020. 9. 14.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능, 남양주 광릉(光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주엽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숲에 자리한 광릉(光陵)은 조선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의 능이다. 광릉은 중앙에 정자각이 있고 그 뒤 좌우 언덕에 능이 있는 동원이강(同原異岡)형식으로 이러한 형식은 광릉이 최초라고 하며, 다른 능과는 달리 참도(參道)와 배위(拜位)가 없는 것도 광릉이 유일하다고 한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石室) 대신 왕릉을 만드는 비용과 인원을 줄이는 회격(灰隔)으로 현궁(玄宮)을 만들고 병풍석을 생략하는 등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조선 전기의 왕실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조선 초 왕릉의 석실(石室) 조성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장례예절을 정리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는 현재의 시멘트와 비슷한 회격(灰.. 2019. 10. 22.
인조(仁祖)와 인열왕후의 능, 파주 장릉(長陵)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長陵)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仁祖)와 왕비인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의 능(陵)이다. 장릉은 왕과 왕비가 합장한 무덤 형태로 원래는 파주 운천리에 있었으나, 사갈(蛇蝎, 뱀과 전갈)이 장릉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으므로 17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천장(遷葬)하였다고 한다. 능침(陵寢)까지는 출입이 제한되어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장릉의 석물들은 합장으로 인해 척수(尺數)가 맞지 않게 된 병풍석ㆍ난간석ㆍ상석만 천장 당시 새로 설치하였고, 다른 석물은 구 장릉의 석물을 그대로 옮겨오는 등 옛 능에 설치되었던 석물과 새로 설치한 석물이 혼재한 상태라고 한다. 장릉(長陵)은 그동안 비공개 문화재였으나 2018년 9월부터 개방하였으며, 조선왕릉의 장릉은 파주 .. 2019. 5. 14.
비운(悲運)의 왕과 왕후들의 능(陵), 파주 삼릉(三陵)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자리한 파주 삼릉(三陵)은 공릉(恭陵)ㆍ순릉(順陵)ㆍ영릉(永陵)의 3능이 있는 곳으로, 왕릉군의 앞머리를 따서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린다. 공릉(恭陵)의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순릉(順陵)의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모두 한명회(韓明澮)의 딸로써, 왕실로 출가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단명하였다. 재실(齋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이 재실은 진종과 효순왕후의 능 재실로, 원래는 전사청ㆍ제기고ㆍ안향청 6칸ㆍ재실 32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재실과 일부 행랑만 남아 있다. 공릉(恭陵)은 1472년(성종3년)에 왕후로 추.. 2018.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