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의 화개산 중턱에 자리한 연산군 유배지(流配地)는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싸여있는 한평 정도의 초가집으로,
음식도 간신히 넣을 수 있는 작은 문 하나가 있는 방에서 사실상 감금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연산군의 유배행로를 보면,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후 경복궁을 나와 남여(藍與)인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연희궁에 유숙한 뒤, 금포ㆍ통진ㆍ강화 등을 거쳐 이곳 교동 고구리의 안치소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유배 길에 수행한 인원은 나인 4명ㆍ내시 2명ㆍ반감 1명ㆍ당상관 1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였다고 하며,
죄인이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둘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고 한다.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하며,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역질에 걸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곳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강화교동은 규모 약 47㎡ 면적으로 예성강ㆍ임진강ㆍ한강이 만나 형성된 조강하류에 위치한 작은 섬이며,
대운도ㆍ고림ㆍ달을신 등으로 불리다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1896년에 교동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에 강화군에 편입되어 1934년에 현재의 교동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강화와 교동은 격리와 감시가 쉬웠으므로 차마 사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천 여년 동안 사용되었다.
교동에 유배된 조선시대 왕과 왕족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을 비롯하여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경안군,
인조의 소생인 숭선군ㆍ낙선군,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ㆍ임성군, 인평대군의 아들 복평군, 영조의 손자 은언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등 다양하며 대부분 역모로 유배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최충헌에 폐위 당한 희종(熙宗)을 비롯하여 부왕인 명종을 퇴위시킴에 따라 유배된 강종(康宗),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퇴위된 충정왕)忠定王),
그리고 위화도회군 후 왕위에서 쫓겨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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