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창경궁은 상왕(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세종이 마련하였던 수강궁(壽康宮) 터에
세조비 정희왕후ㆍ예종비 안순왕후ㆍ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궁궐이며
정치공간인 외전(外殿)보다는 생활공간인 내전(內殿) 궁궐이었다.
창경궁의 춘당지(春塘池)는
본래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창덕궁의 춘당대(春塘臺)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소춘당지)이었으며,
지금의 춘당지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內農圃)라는 논이었다고 한다.
춘당지(春塘池)는 창덕궁 쪽 절벽인 춘장대(春塘臺)와 짝을 이루는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담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1983년에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진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춘당지는 일제가 창경궁을 놀이공간으로 조성하면서 이를 파헤쳐서 내농포(內農圃)를 큰 연못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라고 한다.
춘당지는 서울 도심에서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하여 많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팔각7층석탑(八角七層石塔)은 춘당지 앞에 있는 명나라 석탑으로
기존의 석탑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라마탑의 형태와 비슷하며, 보물 제 1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은 높이 6.5m 규모로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축한 2중의 4각형 지대 위에 세웠으며,
기단부로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평면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11년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부터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 옮겨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백송은 중국인 원산지인 희귀한 나무로 조선시대에 중국에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었다고 하며
현재는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하얗고 껍질조각이 오래되면 저절로 떨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잎은 3개씩 모여난다.
창경궁은 경복궁ㆍ창덕궁에 이어 조선시대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으며,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ㆍ명정문ㆍ홍화문 등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그리고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애증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 궁궐이며,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 등의 현장이 바로 창경궁이기도 하다.
일제는 1909년(순종 3년)에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었으나, 1984년에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다.
창경궁 내에는 명정전(국보 제226호)을 비롯하여
홍화문(보물 제384호)ㆍ풍기대(보물 제846호)ㆍ관천대(보물 제851호)ㆍ옥천교(보물 제386호) 등 문화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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