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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전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by kangdante 2025.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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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위치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 하에 화성사람들의 독립운동과 그 정신을 기리고 격렬했던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전하기 위해 기존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을 확장이전하여 20244월에 개관한 기념관이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와 화성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상설전시실과 화성독립운동의 다양하고 새로운 주제를 바탕으로 매년 전시가 열리는 기획전시실, 그리고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한 어린이체험실 등이 운영되고 있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람시간은 10:00~18:00이며, 휴관일은 11(신정)월요일(공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설 및 추석 당일 등이고 관람료는 무료이다.

 

상설전시실은 ‘1부 국권 침탈과 화성 사람들을 비롯하여 ‘231운동과 화성 사람들의 저항’, ‘331운동 이후 화성의 독립운동’, ‘4부 민족말살정책과 강제동원의 현실’, 그리고 ‘5부 화성의 독립운동가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관련 영상

 

 

‘1부 국권 침탈과 화성 사람들에서는 조선의 19세기 후반은 외세의 간섭과 국권 침탈로 혼란한 상황이 가중되고 있었으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야욕에 맞서 화성사람 민중들의 다양한 구국운동을 펼쳤던 것을 전시하고 있다.

 

화성사람들은 실력을 키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직접 총칼로 맞서 싸우며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투쟁을 벌였다.

 

조선후기 유학자 정윤영의 시문집, 후산문집

 

1894년 8월 청나라와 일본이 전투를 벌인 조선풍도근해 용전일청분격도

 

러일전쟁으로 서울거리를 점령한 밀본군의 모습을 보도한 프랑스에서 발간된 1904년 2월 신문, Le Petit Parisien

 

3.1독립선언서

 

‘231운동과 화성 사람들의 저항에서는 일제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191931일에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고, 1919321일 동탄에서 시작된 화성 3·1운동은 송산서신우정장안향남팔탄 등 화성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일제식민통치기구인 면사무소경찰관주재소 등은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일본인 순사가 타살되는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치열하고도 공세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의 비폭력 원칙에도 불구하고 화성 사람들의 격렬한 시위 양상은 일제식민통치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식의 표출이자 식민지 지배권력에 맞선 최소한의 자위권 행사였다.

 

창상 및 치사원인, 사망원인 등이 기록된 노구치 고조의 사망감정서

 

송산면서신면마도면 주민들은 1919326일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구장 집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1919. 3. 26부터 3. 28까지 사흘에 걸쳐 지역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는 즉시 해산할 것을 명령하고 홍면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총격을 입은 홍면옥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격분한 군중들은 도망가는 노구치 고조를 붙잡아 돌과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홍면옥 신문조서, 만세를 부른 목적을 묻는 질문에 '만세를 부른 목적은 독립'이라고 적혀 있다

 

 

장안우정 3.1운동은 191943일 우정면 주곡리를 시작으로 장암면 석포리수촌리어은리를 거쳐 우정면 쌍봉산화산리한각리화수리 등 각 마을을 돌며 전개된 만세운동이다.

 

장안면우정면 각 마을에서 모인 주민들은 일제식민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집중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장안면사무소우정면사무소화수경찰관주재소가 전소되었으며 일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가 시위 군중에 의해 처단되었다.

 

장안면 사무소

 

우정면 사무소

 

‘331운동 이후 화성의 독립운동에서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정책을 전환하였고, 우리의 독립운동도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방면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화성에서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청년동맹을 비롯한 여러 단체를 결성하는 한편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농민노동운동에도 눈을 돌려 농민과 노동자들이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관련단체를 구성하고 쟁의를 돕는 등의 활동을 하며 일제에 맞섰다.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탈주를 방지하기 위한 족쇄

 

장안,우정 독립운공가 6인의 모습, 좌상으로부터 김덕삼, 김응식, 김교철, 김흥삼, 김덕근, 백순익

 

‘4부 민족말살정책과 강제동원의 현실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전시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황국신민화 정책을 내세우며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치는 한편 모든 자원을 수탈해 전쟁에 쏟아 부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강제동원 된 조선인의 수는 연인원 5~6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화성의 경우 1958년 작성된 강제징용자명부 한 권에서 드러난 인원수가 3,093명에 이른다. 이들은 일본사할린남양 등지의 전쟁터와 고된 작업 현장으로 내몰려 군인이 되기도 하고 탄광비행장군수회사 등에서 일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국채보상운동 영수증

 

1911년 3월에 조사한 토지대장등본,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 토지조사부

 

동양척식주식회사 10년사, 지압조사비 납입통지서

 

프랑스에서 발간된 일간지, 라 크루아 일러스트레, 1905년 5월, 형틀에 달려 죽어가는 조선인의 모습

 

대한자강회 월보 제6호

 

남양의 유지들과 풍화당 소속, 봉림사 원유회 풍화당 1주 촬영,

 

‘5부 화성의 독립운동가에서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뜻을 세우고 일어섰던 화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가슴에 되새기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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