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조 5대 궁궐 중 하나로, 주변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건축과 전통 정원을 잘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고 한다.
창덕궁 후원(後苑)은 울창한 수림과 자연스러운 구릉지대에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연못과 정원을 만들고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있어 있는 조선 정원의 백미(白眉)라고 한다.

창덕궁 후원은 전체 궁궐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며, 부용지(芙蓉池) 일대ㆍ애련지(愛蓮池) 일대ㆍ반도지(半島池) 영역ㆍ옥류천(玉流川) 지역 등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며, 현재 관람코스에서는 옥류천 지역을 제외하고 있다.
부용지(芙蓉池) 일대는 네모난 연못 주변에 부용정ㆍ영화당ㆍ주합루 등이 있는 곳이며, 애련지 일대는 기오헌ㆍ애련정ㆍ연경당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반도지 영역은 부채모양의 관람정과 이중 지붕의 존덕정 그리고 폄우사 등이 있는 영역이며, 옥류천 지역은 다섯 개의 정자와 옥류천이 숨어있는 가장 깊고 은밀한 지역이다.

부용지(芙蓉池) 일대는 후원의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이며, 부용정(芙蓉亭)ㆍ영화당(瑛花堂) 등의 정자와 주합루(宙合樓)와 어수문(魚水門) 이 있다.
부용지는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조성하여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오행설에 따라 조성한 연못이며, 부용정(芙蓉亭)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에게 왕이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하였던 정자라고 한다.


부용정(芙蓉)은 창덕궁 후원의 정자로 1707년(숙종 33년)에 창덕궁 후원에 처음 세웠으며 당시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고, 이후 1792년(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며, 현재 현판 글씨는 1903년(광무 7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직을 맡았던 동농 김가진이 썼다고 한다.
부용정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처마는 겹처마이며, '丁'자와 '亞' 자를 합친 듯한 복잡한 구조의 형태이며 마치 연못에 발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특징이다.


부용지(芙蓉)는 부용정의 연못으로 동서 길이 34.5m 남북 길이 29.4m인 네모난 형태이며, 수심은 약 1.5m이며 연못 가운데엔 둥그런 섬을 두어 동양의 전통 세계관인 천원지방(天圓池方)을 나타내었다.
창덕궁 후원관람은 제한관람지역으로 관람시간표에 맞춰(관람료 5,000원) 회차별 최대 100명(인터넷 예매 50명, 당일 현장발매 50명)까지 해설사의 인솔 또는 지정된 시간 내 자유 관람 할 수 있다.

세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그 일대에서 샘물을 찾게 하여 4개의 샘을 발견하였으며, 각각 옥정(玉井)ㆍ마니(摩尼)ㆍ유리(流璃)ㆍ파려(玻瓈)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우물 4개 중 2개만 남았으나 그마저도 망가져 숙종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남은 우물 2개를 수리한 뒤, 1690년(숙종 16년)에 우물의 역사를 담은 4개의 우물에 대해 기록한 비(碑)와 비각(碑閣)인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지었다.




영화당(瑛花堂)은 언제 처음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광해군 때 영화당 건설 중지를 언급하는 내용이 처음 나오며, 현재의 건물은 1692년(숙종 18년)에 재건하였으며 이중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영화당 앞쪽에는 넓은 마당의 춘당대(春塘臺)가 있었으며,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이곳에서 실제 과거시험이 실시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기우제를 지내거나 작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살피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왕들은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려주었으며 활을 쏘는 곳으로 사용하는 등 영화당과 춘당대를 함께 묶어 활용하였으며, 또한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보는 최종 시험도 여기서 열었다고 한다.
영화당은 영조 이후 왕들이 대보단이나 문묘에 참배하기 전에 하룻밤 묵는 곳으로도 사용하였으며, 원래는 남쪽에 행각과 창고가 늘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주합루(宙合樓)는 창덕궁 후원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며, '주합(宙合)'이란 과자(管子)에서 유래한 말로 '우주(宙)와 합일(合)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합루의 규장각은 조선 역대 임금들의 글과 그림ㆍ유교(遺敎)ㆍ선보 등을 보관하던 일종의 왕실 도서관으로, 1776년(정조 1년)에 정조가 처음 지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얼마 못가 폐지되었으며, 숙종 시기에 규장각을 세워 선대왕들의 어제 등을 모셨으나 그 규모가 작았고 오랫동안 존재감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후 정조가 즉위한 뒤에 척신들을 견제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핵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폭 개편 및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건립한 건물이 바로 주합루이다.

어수문(魚水門)은 주합루 남쪽에 있는 주합루 정문으로 이름은 ‘물(水)과 물고기(魚)’란 뜻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어수문은 왕만이 다니는 문이며 양 옆에 설치된 작은 문 2개로 신하들이 다녔으며, 작은 문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규장각을 지으면서 기능을 나눌 부속건물들이 필요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북쪽에 천석정, 서남쪽에 봉모당과 개유와, 열고관을 지었으며. 현재는 이 중 서향각과 천석정만 남아있다.
규장각 제도가 정비되고 관청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781년(정조 5년)에 규장각을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로 옮겼으며, 이후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부르고 글ㆍ그림ㆍ물품 등을 보관하는 기능은 유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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