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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정무시설과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이 있는 남한산성 행궁(行宮)

by kangdante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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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南漢山城)

삼국시대부터 역사적으로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고 하며,

산성 내에는 행궁(行宮) 등의 건물과 함께 다양한 유적 등이 있다.

 

남한산성 내에 자리한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 行宮)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경기도 기념물에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사적 제48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행궁에는 원래 왕의 생활공간인 상궐 73칸과 집무공간인 하궐 154칸 등 총 227칸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정문 누각인 한남루(漢南樓)와 내행전(內行殿)일장각(日長閣)좌승당(坐勝堂)ㆍ재덕당남행각북행각

좌전외행전 등의 건물과 이위정(以威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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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에 자리한 행궁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1636(인조 14)에 발생하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47일간 싸웠으며,

이후에도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이 여주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조선시대 예비궁궐로,

총융사 이서(李曙)의 계책에 따라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1626년에 완성된 행궁으로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이라 하였다고 한다.

 

행궁에는 원래 왕의 생활공간인 상궐 73칸과 집무공간인 하궐 154칸 등 총 227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상궐에는 왕의 거처인 내행전과 나인과 호위 무사의 거처인 남행각과 북행각이 있었으며,

하궐에는 왕이 신하와 함께 업무를 보는 외행전이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10여년의 복원사업 끝에 2012년에 완공하였으며,

2014년에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행궁의 복원이 큰 몫을 했다고 한다.

 

행궁 관람시간은 10:00~17:00(하절기 10:00~18:00)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고,

입장료는 성인 2,000, 청소년 1,000, 경로는 무료이다.

 

 

일장각(日長閣)은 수어장대가 위치하고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日長山)을 건물이름으로 한 것이며,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1829(순조 29)에 세운 건물이며

발굴조사 과정에서 건물지의 일부를 확인하였으며 2010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외행전(外行殿)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1625(인조 3)에 완공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병자호란 당시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호궤(犒饋)를 이곳에서 행하였다고 한다.

 

좌승당이 지어주기 전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며,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기와를 쌓은 곳 일부를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2010년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1688년(숙종 l4년)에 세운 재덕당(在德堂)

 

광주유수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이위정(以威亭)

 

 

좌승당(坐勝堂)은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며

좌승(坐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는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좌승당은 발굴조사를 거쳐 2002년에 중건한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 밖에 있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은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단을 둔 곳으로 행궁 좌측에는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이 있으며,

우측에는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이 있었다.

 

좌전은 남한산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으나 산성 내에 행궁을 건립하면서

1711(숙종 37)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웠으며,

좌전(左殿)이라 이름붙인 것은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유교풍습을 따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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