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자리한 유릉(裕陵)은 대한제국의 순종황제(純宗皇帝)와 그의 비(妃)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 閔氏), 그리고 계비(繼妃) 순정황후 윤씨(純貞皇后 尹氏)의 합장릉이다.
유릉은 황제와 두 황후를 함께 합장한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 합장릉이며, 중앙에 순종 우측에 순정황후 좌측에 순명황후의 재궁을 두어 기존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는 중국 황제 능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릉(裕陵)은 능침ㆍ침전ㆍ홍살문 등이 직선형으로 배치된 홍릉과 달리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되었으며, 홍릉에 비해 능역의 규모가 다소 좁지만 석물은 홍릉에 비해 사실적이다.
유릉은 홍릉과 합칭(合稱)하여 홍유릉(洪裕陵)이라 불리며, 인근에는 영원(英園)ㆍ회인원(懷仁園)을 비롯하여 덕혜옹주묘ㆍ의친왕묘 등 대한제국 마지막 왕손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유릉은 홍릉과 마찬가지로 왕이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 조성도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구조물을 대폭 확장하였으며, 종래의 정자각 대신 '一'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침의 호석(護石)인 양석(羊石)ㆍ호석(虎石) 대신 능침 앞에서부터 홍살문까지 기린ㆍ코끼리ㆍ해태ㆍ사자ㆍ낙타ㆍ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웠으며, 또 문인석의 금관조복(金冠朝服)과 무인석의 성장(盛裝)이 강조되었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나 1897년(광무 1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며, 1907년에 일제의 강요와 모략으로 고종이 물러나자 황제가 되었으나 1910년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주재로 열린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조약에 조인을 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멸망하였다.
순종황제(純宗皇帝)는 연호를 융희(隆熙)로 하고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 했으나, 1910년에 국권을 강탈당하고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으며 1926년에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명황후(純明皇后)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로 11살의 나이로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1897년에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사망하여 능동(현 어린이공원)에 모셔졌다가 순종 사망 후 유릉으로 이장하였다.
순명왕후는 1907년에 황후로 추존되었고 1926년에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합장하였다.
순정황후(純貞皇后)는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로 순명황후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세의 나이에 동궁 계비로 책봉되었으며, 1907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으로 격하되면서 이왕비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에 머물렀으나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로 불리며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으며, 1966년에 창덕궁 석복헌에서 사망하여 유릉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유릉의 재실은 제관들의 휴식ㆍ제수 장만ㆍ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며, 제향(祭享)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들을 준비하였다.
유릉의 재실은 홍릉과는 달리 좌우 동형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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