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는 몽고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천도(遷都)하여 39년간 사용하였던 고려의 궁궐과 관아건물 터였다고 한다.
강화의 궁궐은 1270년(원종 11년)에 몽골과 화친을 맺고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38년간의 강화도 천도를 청산하면서 일부만을 남기고 궁궐ㆍ편전ㆍ성곽은 철거하였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며,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강화로 천도 후에는 당시 양광도(楊廣道) 강화현(江華縣) 주소를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바꾸었으며, 세조ㆍ태조의 묘지를 강화도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고려 궁궐은 개성으로 환도할 때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여 궁궐의 흔적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고려궁지에는 현재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을 비롯하여 외규장각(外奎章閣)ㆍ이방청 등의 건물과 강화 동종(江華 銅鐘)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강화지방의 중심업무를 보던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장녕전ㆍ만녕전ㆍ유수부 동헌ㆍ이방청ㆍ외규장각 등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대분 불타 없어졌으며, 이후 1977년에 강화 전적비정화사업으로 일부 복원하였다.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은 고려 궁궐이 있던 곳에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자리에 유수부 동헌을 지은 것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으로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에 1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원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년)에 개수하였지만 그 후 퇴락한 것을 1977년에 복원ㆍ수리하였으며, 정면은 모두 사분합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2중 장대석으로 조성된 기단 위에 네모꼴의 다듬은 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고려궁지의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왕립관련 도서를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의 명에 의해 강화에 설치하였으며, 왕실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의 서적과 왕실 물품을 보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에서 국왕용인 어람용(御覧用) 의궤 340권을 미리 빼돌려 갑곶으로 옮겨 놓고 강화도 철수 때 그 의궤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고려궁지의 강화 동종(江華 銅鐘)은 종신에 있는 명문을 통해 1711년(숙종 37년)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종의 규모는 높이 176cm 지름 145cm 두께 21㎝이다.
종의 정상부에 있는 용뉴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고 종신을 상하로 구분하는 중앙의 횡대는 한국종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이라고 하며, 보물 제11-8호이다.
강화유수부 이방청은 조선 중기 강화유수부의 6방(이방ㆍ호방ㆍ예방ㆍ병방ㆍ형방ㆍ공방) 중 하나인 이방의 관청으로, 1644년(효종 5년)에 유수 정세규(鄭世規)가 건립하고 1783년(정조 7년)에 유수 김노진(金魯鎭)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掛笏堂)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방청은 한식 목조 단층 ㄷ자형 기와집으로 지붕 옆면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며, 온돌방 8칸 우물마루 청마루 12칸 부엌 1칸 등 총 21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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