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은 1418년(세종 즉위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세종이 마련하였던 수강궁(壽康宮) 터에 세조비 정희왕후ㆍ예종비 안순왕후ㆍ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궁궐이다.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으며, 명정전(국보 제226호)을 비롯하여 홍화문(보물 제384호)ㆍ풍기대(보물 제846호)ㆍ관천대(보물 제851호)ㆍ옥천교(보물 제386호) 등 다수의 국가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보물 제384호이다.
홍화문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으며,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옥천교(玉川橋)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있는 것으로 반원아치형태의 홍예(紅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보물 제386호이다.
궁궐 안의 다리인 만큼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만들어진 시기는 창경궁을 짓던 때와 연관 지어 1483년(성종 14년)인 것으로 여겨진다.
명정문(明政門)은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이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다시 지었으며,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명정전은 조선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국보 제226호이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숭문당(崇文堂)은 국왕의 경연(經筵)을 벌이던 곳으로, 글자 그대로 문(文)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숭문당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순조 때(1830년) 화재로 불탄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하였으며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함인정(涵仁亭)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ㆍ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함인정은 1633년(인조11년)에 건립되어 1830년(순조30년)에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되었으며,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이지만 19세기 궁궐기록화인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삼면이 막혀 있다.
경춘전(景春殿)은 1484년(성종15년)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ㆍ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ㆍ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34년)에 중건되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며 이곳에서는 정조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인수대비)ㆍ숙종비 인현왕후ㆍ정조의 생모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통명전(通明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며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통명전은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으며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으며, 이곳에서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 옆에 있는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양화당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며,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30년)에 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34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영춘헌(迎春軒)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集福軒)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으로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순조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34년)에 재건되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11년)에 사도세자와 1790년(정조14년)에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며,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다.
집복헌에서의 전시기획은 주칠로 마감한 원형 소반 위에 정갈하게 놓인 백자 그릇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놓는 다과상을 반복 구성하여 한국의 색깔과 조형미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창경궁 안에 있는 관천대는 천문 관측소이며, 창경궁 안에 있는 것과 옛 북부 관상감 자리인 전 휘문고등학교 교지 등 조선시대에는 2개의 관천대가 있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관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추정하는 깃발을 세운 화강암으로 만든 대이며, 높이 228㎝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으로 보물 제846호이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고 하며,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전해진다.
태실(胎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으로 창경궁에는 순조의 태가 안치되어 있었으며, 태항아리는 1927년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겨가고 현재는 비와 석조물만 남아있고 8각형의 돌난간은 1982년에 해체 보수한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을 기본으로 한 부도(승려의 사리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8각의 돌난간이 둘러놓았고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태실비가 있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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