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경희궁(慶熙宮)은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하나로, 광해군이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리고 왕기설(王氣說)을 누르기 위해 1617년(광해군 9년)에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경희궁은 원래 선조(宣祖)의 5남 정원군(定遠君)의 사저(私邸)였으며,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말에 따라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경희궁에는 현재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ㆍ영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태령전(泰寧殿)ㆍ숭정문ㆍ자정문ㆍ흥화문 등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공사관계로 숭정전만 공개하고 있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한 후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많은 왕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거처하면서 정궁의 기능을 일정부분 나눠서 수행하였다.
경희궁은 1620년(광해군 12년)에 완공되었으며 정전ㆍ동궁ㆍ침전ㆍ별당 등 1,500여 칸에 달하는 등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東闕)인 창덕궁과 비교하여 서궐(西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경희궁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가 1760년(영조 36년)에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경희궁에는 회상전ㆍ흥정당ㆍ집경당ㆍ숭정전ㆍ흥화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경술국치 뒤 건물들은 없어지고 그 터에 경성중학교가 세워졌으며, 그 후 1994년에 정전인 숭정전의 복원작업 등 몇몇의 전각들을 복원하였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은 사라지고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고 말았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가장 많이 파괴된 궁궐이며, 이는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후에도 경희궁에는 조선후기의 왕들이 다수 거처하였고, 경종ㆍ정조ㆍ헌종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으며 정조는 세손 시절을 경희궁의 동궁인 존현각(尊賢閣)에서 주로 보냈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에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숭정전(崇政殿)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경희궁 건설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년)에 건립되었으며,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ㆍ사신접대 등 공식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숭정전은 특히 경종ㆍ정조ㆍ헌종 등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며,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일본인 사찰에 팔았으며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숙종은 재위 46년 동안 창덕궁과 경희궁에 번갈아 거처한 왕으로 경희궁과 가장 큰 인연을 맺었으며, 1680년(숙종 6년)에는 인경왕후를 잃는 아픔도 겪었다.
이후 창덕궁ㆍ창경궁에 있던 숙종은 1717년(숙종 43년)에 왕세자(경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경희궁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으며, 1720년(숙종 46년)에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서울 도성 안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대로를 맞이하기 위해 독특하게 동쪽을 향해 있었으며,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건물은 남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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