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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과 그의 아들 명종의 강릉(康陵)

by kangdante 2019.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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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하고 있는 태릉(泰陵)은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이며,

그 옆에 자리한 강릉(康陵)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능이다.

 

태릉과 강릉은 한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1965년에 태릉선수촌이 중간에 건립되면서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으며, 현재는 태릉강릉 내 연계된 숲길(1.8km)로 개방하고 있다.

 

 

문정왕후는 원래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선정릉(宣靖陵)으로 옮기고

자신도 후일 합장하려 하였으나, 여름철 홍수 때에는 정릉 주변까지 침수되는 관계로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하였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 따로 태릉을 만들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중종인종명종의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당의 측천무후와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권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여인천하로 몰아넣은 인물이며 을사사화(乙巳士禍)로도 유명하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했으며,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는 양주 온릉(溫陵)에 안장되었고

두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章敬王后)는 희릉(禧陵)에 묻혔다.

조선 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중종의 정릉과 단종의 장릉, 그리고 태조의 건원릉뿐이다.

 

태릉은 봉분 1기만 있는 단릉(單陵)이며 구름무늬(雲彩)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둘렀고,

석인(石人)의 조각은 목이 바르고 얼굴이 커서 사등신(四等身) 정도의 각주형(角柱形)이며

입체감이 없는 것으로 당시 석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강릉(康陵)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능이며,

1575(선조 8)에 왕비릉도 왕릉과 나란히 앉혀 쌍릉(雙陵)을 이루게 하였다.

 

명종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인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집권한 내내 '눈물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렴청정의 그늘에서 시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명종 재임기간동안 밖으로는 왜구들의 노략질로 백성들을 괴롭혔으며,

안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스스로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였으며

임꺽정(林巨正)의 일화는 유명하다.

 

명종은 1563년 순회세자를 잃고 2년 뒤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세상을 뜨자

허약했던 명종은 병을 얻어 1567년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명종이 죽은 후 양자로 입양한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8개월간 수렴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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