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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명릉(明陵)ㆍ대빈묘와 창릉(昌陵)이 자리한 서오릉(西五陵)

by kangdante 2019.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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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자리한 서오릉(西五陵)은 명릉(明陵)창릉(昌陵)경릉(敬陵)익릉(翼陵)

홍릉(弘陵)의 오릉(五陵)과 순창원대빈묘 등이 있는 조선 왕실의 왕릉군으로 사적 제198호이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祭禮)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이면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명릉(明陵)은 조선 제19대 숙종(肅宗)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의 능이 있는 곳으로,

정자각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오른 쪽 쌍릉(雙陵)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며, 왼쪽 단릉이 인원왕후의 능이다.

 

숙종은 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후 46년 재위기간 동안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로 이어지는

세 왕비를 두었으나 이들 왕비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 씨와 숙빈 최 씨에게서 각각 경종과 영조가 되는 왕자를 낳았다.

 

 

숙종 재위기간 동안에는 집권세력의 붕당정치 정쟁이 심하였으며,

경신환국(庚申換局)기사환국(己巳換局)갑술환국(甲戌換局) 등 세 차례의 환국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환국을 이용하여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고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숙종의 치세기간 동안 신하와 관료 사이의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왕권은 강화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명릉에 장사 지낼 때 왕의 능을 비워놓아 쌍릉으로 조성하였고,

정자각을 중간에 위치하게 하였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同原雙墳)으로 조성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명릉은 쌍릉과 단릉의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다.

 

 

 

대빈묘(大嬪墓)는 숙종의 후궁과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능으로 경릉에서 홍릉으로 들어가는 좌측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조성되어 있으며, (경종)을 낳은 생모는 원으로 격상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희빈 장씨는 왕의 생모임에도 폐비가 된 관계로 무덤을 원이 아닌 묘로 칭하였다.

 

대빈묘는 봉분 주위를 곡장으로 둘러싸고 장명등과 문인석 한 쌍만 배치되어 있으며,

위치나 작은 석물 등 전체적인 꾸밈새가 일반 사대부 묘보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창릉(昌陵)은 예종(睿宗)과 두 번째 왕비인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으로,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만든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예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안순왕후의 능이며,

창릉의 석물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랐는데 상하계가 명확해 능제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였던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자로 책봉된 후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 12개월 동안 신하들에 의한 일종의 섭정이었던 원상(院相)을 실시하며 형식적으로 결재만 하였다고 한다.

 

예종은 재위기간동안 남이장군의 옥사를 수숩하고 각 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屯田)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이 있다.

 

 

안순왕후는 한백륜(韓伯倫)의 딸로,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 병사하자 세자 후궁 소훈(昭訓)이 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예종이 사망하자 인혜대비명의대비에 책봉되었고

1498(연산군 4)에 사망하여 창릉에 안장되었다.

 

두 능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예종 능에는

혼령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의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에 고리모양의 무늬가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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