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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예릉(睿陵)ㆍ희릉(禧陵)ㆍ효릉(孝陵)이 자리한 서삼릉(西三陵)

by kangdante 2019.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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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西三陵)은 예릉(睿陵)희릉(禧陵)효릉(孝陵)의 삼릉(三陵)

소경원(昭慶園)의령원(懿寧園)효창원(孝昌園), 그리고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이 있는 묘역이다.

 

서삼릉의 묘역은 예릉(睿陵)희릉(禧陵)과 의령원(懿寧園)효창원(孝昌園) 등 일부 지역만 공개되고 있으며,

나머지 효릉(孝陵) 등 일부 묘역은 현재 비공개지역으로 되어 있다.

 

 

예릉(睿陵)은 철종(哲宗)과 철인황후(哲仁皇后) 김씨의 능으로,

영조 때 편찬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조선왕조의 형태라고 한다.

 

철종 다음의 고종과 순종은 황제였으므로 왕릉의 법식이 아니라 황제 능의 법식을 따랐기 때문이며,

철종과 철인황후는 1908(융희 2)에 각각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철종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아들로 강화도령으로 유명하며,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황후(純元皇后)의 명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14년간 처음 3년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 하였다.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재임기간 내내 세도정치에 눌려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왕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철인황후(哲仁皇后)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며, 1851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1858년에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왕비가 된 이후에도 안동 김씨 친정을 위한 주청을 계속하다가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었고,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철종 사망 15년 후인 1878년에 자손 없이 42세에 사망하였다.

 

 

예릉(睿陵)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된 쌍릉이며,

곡장을 두른 봉분에는 혼유석망주석장명등문인석무인석석양석호석마 등의 석물이 배치되었다.

 

 

희릉(禧陵)은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으로,

처음에는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537(중종 32)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장경왕후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며, 1506년 중종의 후궁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다음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 사이에서 1(인종) 1(효혜공주)를 낳았으며 1515년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이며, 이 중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42기이고,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인 원()14기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인 묘()64기 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이 있는 제릉(태조의 원비 신의고황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고 한다.

 

 

희릉의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석인무석인장명등혼유석 등의 석물(石物)을 배치하였다.

 

 

 

효창원(孝昌園)은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으로,

원래는 효창묘였으나 1870년에 효창원으로 격상하였으며

원래는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내에 있었으나 1944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宜嬪 成氏)의 소생으로 178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창덕궁 별당에서 5세의 나이에 죽었다.

 

 

 

의령원(懿寧園)은 영조의 세손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의 큰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능이며,

1751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불과 3세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의소묘(懿昭墓)라 불렸다가 1870년에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하였다고 하며,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으나 1949년에 현제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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