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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공존하는 덕수궁(德壽宮)

by kangdante 202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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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궁궐이며,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구한말(舊韓末)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으나 고종(高宗)1907년에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長壽)를 빈다는 의미로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명문(光明門)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咸寧殿)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대한제국 시절에 건립되었던 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덕수궁이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들이 철거되면서 1930년대에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후 2018년에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광명문도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다.

 

 

중화문(中和門)는 중화전의 정문(正門)으로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 양식은 중화전과 같이 조선 후기 수법을 가진 다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중화문에서 중화전까지 가는 길 가운데에는 삼도(三道)라 불리는 세갈래 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넓고 단이 높은 길이 왕이 가마를 타고 지나던 어도(御道)이며,

어도 좌우로는 문무백관이 서는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品階石)이 나열되어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德壽宮)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으며, 왕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며,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화전(中和殿)1902(광무 6)에 지었으나 1904년에 불에 타고,

지금의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즉조당(卽祚堂) 일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으로,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곳이며,

준명당(浚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이었던 경운궁(慶運宮)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는데,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석어당(昔御堂)은 현존 유일한 목조 2층 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으며,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이 두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준명당(浚明堂) 세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자,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1593(선조 26)부터 행궁(行宮)이 되었다.

 

이후 1611(광해군 3)에는 이 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으나,

1615년 창경궁으로 왕궁이 옮겨짐으로써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가 고종이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광무 1)에 건축되어 1904(광무 8)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으며 19191월에 이곳에서 고종이 사망하였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심이 되는 방의 평면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과 또 그 옆으로 누마루를 두었고,

이들 전면과 후면에는 툇마루와 온돌방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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