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자리한 홍릉(洪陵)은 고종(高宗)과 그의 비(妃)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이며,
옆에 있는 유릉(裕陵)과 합칭(合稱)하여 홍유릉(洪裕陵)이라 불리며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고종은 1919년에 홍릉(洪陵)에 초장 봉릉(初葬 封陵)되었으며,
명성황후는 1895년에 청량리 홍릉(현재 숭인원)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에 현재의 홍릉으로 이장하여 합장(合葬)한 동봉이강릉(同封異岡陵)이다.
홍릉의 특징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선포되고 왕이 황제가 됨으로써
능역 조성도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구조물을 대폭 확장하였으며,
종래의 정자각 대신 '一'자형의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능침의 호석(護石)인 양석(羊石)ㆍ호석(虎石) 대신 능침 앞에서부터 홍살문까지
기린ㆍ코끼리ㆍ해태ㆍ사자ㆍ낙타ㆍ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웠으며,
또 문인석의 금관조복(金冠朝服)과 무인석의 성장(盛裝)이 강조되었다.
고종(高宗)은 흥선대원군의 아들로 서양 각국과 수교하며 개화정책을 펼치고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1905년)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1907년에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으로 퇴위되고
덕수궁(경운궁)에 태왕(太王)으로 있다가 1919년에 사망하였으며,
일본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나돌아 국장일인 3월1일에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1866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치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시해 당하였다.
조선 왕릉의 재실(齋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 등이 상주하는 곳으로,
일반적으로 재방ㆍ안향청ㆍ제기고ㆍ전사청ㆍ행랑채ㆍ우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은 제관들의 휴식ㆍ제수 장만ㆍ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며,
제향(祭享)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들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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