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서울

조선말 격동의 정치 산실, 운현궁(雲峴宮)

by kangdante 2022. 2. 23.
728x90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雲峴宮)은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사가(私家)였으며 사적 제257호이다.

 

운현궁에는 현재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을 비롯하여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로당(二老堂) 등의 건물과

건물 내에는 소장되어 있던 가구 등 유물과 당시의 생활모습생활용품 등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노안당(老安堂)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1864년에 노락당(老樂堂)과 함께 지었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라고 한다.

 

노안당(老安堂) 이름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 라는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라 하며,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728x90

 

 

노안당은 평면은 T자형 온돌방과 마루로 실내를 구성하고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를 달아냈으며,

공간구성과 견실한 목조 구조 그리고 세부기법에서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한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으며,

고종 즉위 후 이곳에서 서원철폐경복궁 중건 등의 주요 개혁사업 추진 등의 국정을 논의하였다고 한다.

 

 

운현궁(雲峴宮)이라는 이름은 서운관(書雲觀)이 있던 부근의 구름재(雲峴) 지명을 따서 1863년부터 불렸다고 하며,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시킨 산실이기도 하다.

 

당시 운현궁에는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며,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다고 한다.

 

 

운현궁은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 몰수되어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울 만큼 파손되었으며,

미군정 때 건물의 일부를 흥선대원군의 후손이 소유권을 찾게 되었으나

유지관리가 어려워지자 1991년에 서울시에 매도하였다고 한다.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며,

1864년에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로 노안당과 함께 지은 운현궁의 안채이다.

 

노락당은 1866년에 삼간택(三揀擇)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곳이기도 하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행해진 곳이라고 한다.

 

 

노락당 평면은 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만들고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하며,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색이라고 한다.

 

노락당은 운현궁 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냈으며,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말기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로당(二老堂)은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안채로 1869년에 이로당(二老堂)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고 하며,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건물이라고 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