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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도

조선초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었던 사찰, 회암사(檜巖寺)

by kangdante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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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위치한 회암사(檜巖寺)는 인도에서 원()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1326(고려 충숙왕 13)부터 1328년까지 머물렀던 지공(指空)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회암사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었던 절이었으며,

1424(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사찰규모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회암사는 1566(명종 21) 이후 불교를 배척하는 유생들의 방화로 불타고 사세(寺勢)가 기우러져 폐사되었으며

1821(순조 21)에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와 비()를 중수하면서,

회암사 옛터에서 500m 위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회암사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조사전관음전삼성각범종루 등의 건물과

언덕위에는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제388)과 조선 초에 건립된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무학대사비

회암사지부도탑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맷돌당간지주지공스님의 부도 및 석등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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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회암사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여 나옹(懶翁) 스님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無學大師)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 마다 대사를 보내 참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회암사는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효령대군 또한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1472(성종 3)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를 시켜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하며,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에는 보우스님이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중흥을 기도하였으나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65(명종 20)에는 보우스님은 회암사 중창사업을 마치고 낙성식과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을 기리기 위해

문정왕후를 참석시킨 가운데 성대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려고 했으나

밥의 색깔이 피로 물들인 것처럼 붉어서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행사에 모인 사람들이 불길한 예감이 들던 차에 행사에 참석하려던 문정왕후 윤씨가 승하하였다는 전갈이 있어

많은 승려들과 백성들이 놀라서 흩어졌으므로 행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보우스님은 설악산으로 은거하였으며,

이 당시 율곡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함에 따라

제주도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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