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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거대한 은행나무잎이 환상적인 서울 문묘(文廟)

by kangdante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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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 내에 자리한 서울 문묘(文廟)는 공자(孔子)를 위시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유학자의 명현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하는 묘당(廟堂)이다.

 

문묘 내에는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전사청악기고제기고악생청

동무서무대학당(戴學堂)비천당(丕闡堂) 등의 건물이 있으며,

시설물 일체가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문묘는 714(통일신라 성덕왕 13)부터 갖추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 내에 설치하였고

조선시대에는 1398(태조7)에 유학의 최고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 마련하여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서울 문묘는 1398년에 완성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선조 34)에 중건한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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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의 구조를 살펴보면 중앙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에는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 뒤편에는 유생들을 교육하고 그 앞에서 과거시험을 보던 명륜당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도서관인 존경각이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成均館)은 유학교육과 함께 선현(先賢)의 제사를 받드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주자학 정신에 입각한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조선 5백 년 동안 정치사상을 확립하고 관료체제를 형성하였다.

 

성균(成均)’이라는 명칭은 

주례(周禮)대사악장 성균지법 이치건학지학정(大司樂掌 成均之法 以治建學之學政)’에서 나온 것이며,

1298(고려 충렬왕 24)에 성균감으로 부르고 

1308(충선왕 원년)에 성균관으로 고쳐 부른 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라 한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기구를 새로 개편하고 3년제의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였으며,

근대화에 대처하기 위해 유학 외에 지리산술 등의 과목을 교육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1911년 성균관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고쳐져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문묘의 제사와 유학기관의 재산관리만을 담당하는 곳으로 전락하였으나 1945년 광복으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이듬해 유림들의 성금으로 국립대학의 전통을 되살리고

근대식 교육을 지향하고자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정비각(廟庭碑閣)은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으로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이 비문을 작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때 새로 각석하고

당시의 문장가인 이정구(李廷龜)가 비음(碑陰)을 지어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학당(戴學堂)은 정면 4칸 측면 칸의 건물로 일명 수복청이라고도 하며,

문묘의 관리를 담당하던 하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한다.

 

전사청(典祀廳)은 대성전 서쪽에 6칸 규모로 지어진 건물로 석전 때 제찬을 준비하는 곳이다.

 

 

비천당(丕闡堂)은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비천당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글 중 丕闡大猷(비천대유)’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라 한다.

 

비천당은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하기도 하였으나 한말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다가

6.25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184.4의 규모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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