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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조선시대 시구문(屍口門), 광희문(光熙門)

by kangdante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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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퇴계로에 위치한 광희문(光熙門)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서울 성곽의 4소문 중 하나로

남소문(南小門)이라고도 부르며,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던 시구문(屍口門)이었다.

 

광희문(光熙門)1396(태조 5)에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것으로,

1711(숙종 37)에 고쳐 쌓았고 1719(숙종 45)에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光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며 소의문(서소문)과 더불어

한양시민들이 죽으면 상여에 싣고 운구 할 수 있는 저승 문이었으며,

조선조 500년간 시신(屍身)은 반드시 이 두 문중 하나를 거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광희문 밖은 시신이 즐비하였으며

1886(병인년)에는 도성 안에 콜레라가 크게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광희문 밖은 내다버린 시체와 죽기 직전의 환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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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백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지켜 본 광희문이므로

조선시대에는 시구문 돌가루가 주술적(呪術的)인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서울에 가거든 시구문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광희문(光熙門)은 소의문(昭義門)혜화문(惠化門)창의문(彰義門)과 함께 조선 한양의 4소문(小門) 중 하나이며,

소의문은 일제 때 헐리고 없어졌으며 혜화문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광희문은 1899년에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한양성곽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광희문과 동대문까지의 성곽이 모두 헐리게 되었으며,

1915년에는 광희문 문루(門樓)가 무너져 홍예(紅霓)만 초라하게 남았었다,

 

그 후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5년에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옮기고 문루(門樓)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여 평을 녹지화하고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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