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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 진관사(津寬寺)

by kangdante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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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북한산(北漢山)에 자리하고 있는 진관사(津寬寺)는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

 

진관사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1011(현종 2)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하였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신라시대 고찰'이라는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 서 승당이 각 30,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10, 제운루정재소일주문해탈문종각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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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권근(權近)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진다.

 

 

진관사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진관사의 중심 전각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단층건물이며 모서리마다 창방 뺼목을 용두로 조각하였고, 외부에 금단청을 하였으며 외벽에는 심우도와 각종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안의 불상은 석가모니불(현세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미륵보살(미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화는 비로자나불(법신불)노사나불(보신불)석가모니불(화신불)의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비로자나불(중앙)노사나불(좌협시 뒤)석가모니불(우협시 뒤)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주존인 비로자나불은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을 입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의 손모양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은 양손을 위로 한 채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다. 주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석가여래는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고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가진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대웅전 석가여래좌상은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며 육계의 윤곽도 구분이 되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반쯤 뜬눈이고 평면적이면서 예리한 콧잔등과 꼭 다문 입술 등의 이목구비에서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하였으며,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살며시 올려 선정인을 하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검지를 약간 들어 땅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연화대좌 위에 있다.

 

 

좌협시 미륵보살상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에는 영락과 장신구로 장엄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협시 제화갈라보살상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좌협시 미륵보살상과 같은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지만 수인을 서로 대칭적으로 표현하여 좌우 균형을 맞추고 있고, 머리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굵고 단순한 옷주름과 긴 듯한 상 체표현 등이 본존불과 닮았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으나, 1950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 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진관(眞觀)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을 조성하였다.

 

이후 1968년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 1970년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 1972년 나가원(那迦院) 신축, 1974년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나가원(那迦院)은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며, 1972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요사채이다.

 

나가원은 요사채지만 건물 외부는 동자도와 화훼도 같은 단청이 칠해져 단정한 멋이 느껴지며, 어간에는 현판을 비롯하여 주련 8기가 걸려 있다.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세계인 명부(冥府)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왕생으로 이끄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저승세계의 심판관들인 시왕(十王)이 좌우로 늘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중심이 되기에 지장전(地藏殿)이라 부르기도 하며, 지장보살의 좌우 협시(挾侍)는 스님모습의 도명존자와 상자를 든 무독귀왕이다. 

 

 

독성전(獨聖殿)의 독성(獨聖)홀로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 부르며, 나반존자는 16아라한의 한 분이신 빈두로파라타존자를 말하며 신통이 뛰어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세상을 제도하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는 분이다.

 

독성전에는 독성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1)독성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2)와 함께 산신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9)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월광보살칠성대군을 모신 곳으로, 석조여래좌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0)과 칠성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7)가 봉안되어 있다.

 

칠성신앙은 수명과 복,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하여 민간에서 오래전부터 신앙되어온 것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라고 한다.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된 큰 봉지가 벽면에 부착된 것을 떼어내자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는 19193.1운동 당시 기관이나 단체가 제작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으로 태극기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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