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德壽宮)은 조선 5대 궁궐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궁궐이며 구한말(舊韓末)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집이었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자,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1593년(선조 26년)부터 행궁(行宮)이 되었다.


중화전(中和殿)은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덕수궁(德壽宮)의 중심 건물이며 왕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화전은 1902년(광무 6년)에 지었으나 1904년에 불에 타고 지금의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덕수궁의 광명문(光明門)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咸寧殿)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대한제국 시절에 건립되었던 문이다.
일제 때 덕수궁이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들이 철거되면서 1930년대에 중화문 서남쪽으로 옮겨졌고, 그 후 2018년에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광명문도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다.




함녕전(咸寧殿)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1897년(광무 1년)에 건축되어 1904년(광무 8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으며 1919년 1월에 이곳에서 고종이 사망하였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ㄱ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중심이 되는 방의 평면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과 또 그 옆으로 누마루를 두었고, 이들 전면과 후면에는 툇마루와 온돌방을 두었다.




덕홍전(德弘殿)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외관은 전통식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덕홍전 자리는 원래 황후의 침전을 대신하여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신 경효전이었으나 1904년에 화재로 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덕홍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즉조당(卽祚堂)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으로, 덕수궁의 본래 이름이었던 경운궁(慶運宮)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으며,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에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현재의 석어당(昔御堂)ㆍ즉조당(卽祚堂)ㆍ준명당(浚明堂) 세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석어당(昔御堂)은 현존 유일한 목조 2층 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으며,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두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곳이며, 준명당(浚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은 대한제국 고종(高宗)의 연회장이면서 외교 접견실로 사용되었고 순종(純宗)의 황제 즉위식이 열린 건물이며, 일제에 의해 철거된 지 100여 년 만인 지난 2024년 9월에 재개관하였다.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신축한 건물이며,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 1층은 폐현실이고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陛見)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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