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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충청도

치열한 의병 항일전투가 있었던 홍주성,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by kangdante 2019.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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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위치한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은 처음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의 성곽은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있다.

 

홍주읍성은 백제시대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1451(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고 전해지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둘레가 533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홍화문(洪化門)은 홍주성의 남문으로,

최근 발굴을 통해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文樓)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으며

2013년 복원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홍화문으로 남문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홍주읍성은 1972년에 사적 제231호로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7월에 지금의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 변경되었다고 한다.

 

 

홍주읍성 내에는 현재 남문(南門) 홍화문(洪化門)을 비롯하여 동문(東門) 조양문(朝陽門),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과 안회당의 외문(外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

그리고 홍주성 역사관과 천주교 순교자들의 감옥터였던 옥사(獄舍) 등이 있다.

 

홍주읍성의 홍화문(洪化門)과 조양문(朝陽門) 외에 서쪽의 경의문(景義門)과 북쪽의 망화문(望華門)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찰부재(Building Material of Temple)는 조선 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건물과 탑을 부수고

그곳에서 나오는 부재들을 관아건물과 유교시설을 사용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홍주성 주변의 사찰부재들도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을 때 사용하였다고 하며,

이와 같은 사실은 홍주성벽 곳곳에 사용된 탑의 몸돌과 여러 사찰관련 부재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병오항일의병기념비는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당시 죽은 일본군을 위하여

1907년에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을 써서 이를 애도하는 애도지비를 세웠는데,

해방이 되자 애도지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1905년에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안병찬(安炳瓚) 등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6년에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6문의 화포로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덕산(德山)으로 쫓아냈다고 한다.

 

 

홍주감옥은 천주교 박해기간동안(1791~1869년)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된 곳으로

옥중생활은 너무도 비참하였고 교수형이 제일 많이 자행되었다고 전하며,

현재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1872년에 제작된 홍주지도를 통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2012년에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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