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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16

정치 공간이 아닌 왕실의 생활 내전(內殿)이었던 창경궁(昌慶宮)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은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공간인 외전(外殿)보다는 생활공간인 내전(內殿)으로 더 발달했다고 한다. 창경궁은 경복궁ㆍ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며, 처음 이름은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 홍화문(弘化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창경궁의 정문이며, 동향 중층 우진각 지붕으로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으며,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경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 2019. 10. 3.
단청이 없는 소박한 궁궐, 낙선재(樂善齋) 서울 종로구 와룡동의 창덕궁 내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는 헌종(憲宗)의 서재 겸 사랑채로,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닌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 건물이다. 헌종은 자신과 효정왕후(孝定王后) 사이에 자식이 없자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면서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를 지었으며, 이듬해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고 수강재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왕실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純元王后)를 모신 곳이었다고 한다. 낙선재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그리고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사망하는 등 황족.. 2019. 10. 2.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과 전통 정원을 간직한 창덕궁(昌德宮)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조 5대 궁궐중 하나로, 주변의 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건축과 전통 정원을 잘 간직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궁궐이다. 창덕궁은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405년(태종 5년)에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본궁(本宮)에 대한 피방(避方)의 궁궐로 건립하였으며, 경복궁보다 왕들이 머문 기간이 더 길었다고 한다. 창덕궁은 동쪽에 자리 잡은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東闕)로도 불렸으며,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政事)를 돌보던 외전(外殿)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內殿),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휴식공간으로 꾸민 후원(後苑)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덕궁은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 2019. 10. 1.
조선시대 궁궐 중 정궁(正宮), 경복궁(景福宮)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며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렸으며, 다른 궁궐에 비해 전체모습이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은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로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1405년(태종 5년)에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고 한다. 경복궁은 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겪어 이에 대한 복구가 거듭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대규모 재건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현재 경복궁 내에는 근정전ㆍ경회루 등 국보(國寶)와 자경전ㆍ근정문 등 보물(寶物)을 비롯하여, 수정.. 2019.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