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부평구 삼산동에 위치한 부평역사박물관은 부평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지역주민에게 정주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해 지난 2007년 3월에 개관한 박물관이다.
부평역사박물관은 1ㆍ2층으로 나누어 농경문화실ㆍ부평역사실ㆍ특별전시실 등으로 전시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며, 특별전시실은 지역 예술인을 위한 기획전시 공간이라고 한다.
부평역사실에는 전통시대의 부평ㆍ경인철도의 개통과 대도시 부평의 시작ㆍ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경제수탈ㆍ일제강점기 강제동원ㆍ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부평의 변화ㆍ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부평의 변화ㆍ인천육군조병창 미쓰비시 사택의 철거와 보존ㆍ6.25전쟁 발발과 부평ㆍ애스컴시티와 부평ㆍ애스컴시티와 캠프마켓ㆍ부평수출산업공단의 조성과 노동운동의 전개 등으로 전시하고 있다.
농경문화실은 전통시대 부평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사계절 농촌 풍경ㆍ사계절 농경기구ㆍ선조들의 일생ㆍ전통시대 생활사ㆍ전통시대 놀이ㆍ전통시대 목가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인철도가 1899년에 부설된 이후 부평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으며, 교통 및 지리적 이점이 작용하여 일제는 부평에 대규모 군수시설인 인천육군조병창을 건설하여 강제 동원의 현장으로 삼았다.
부평의 중심은 경인철도 개통 이후 지금의 부평역 일대로 변화하였으며, 근대의 산물이자 수탈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함께 부평은 근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자국의 경제안정을 위하여 한반도의 각종 생산물에 대한 개발과 판매 독점권을 장악하였으며, 1918년에는 일본의 쌀값 폭등을 계기로 일본 내 부족한 식량을 한반도에서 조달하려는 산미증식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소작료와 조합비 등 각종 비용을 조선 농민에 전가시켜 농민층의 몰락을 가져왔고, 조선인들은 미곡 반출 증가에 따른 만성적인 춘궁에 고통 받았다.
일제는 만주침략 이후 장기화 된 전쟁으로 병력의 소모가 커지자 전면적인 국가 통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위해 일제는 인적ㆍ물적ㆍ자금 동원을 규정한 전시수권법으로써 50개조에 달하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ㆍ공포하였다.
국가총동원법과 관련 법령에 근거하여 국가권력이 실시한 인적ㆍ물적ㆍ자금동원 정책을 의미하며, 일제의 치밀한 관리 하에 정책적ㆍ조직적ㆍ집단적ㆍ계획적ㆍ폭력적으로 수행되었다.
부평 2동에 남아있는 미쓰비시 사택은 크게 구사택지와 신사택지로 구별되며, 구사택지의 건물은 일정한 배치의 규칙을 보이지 않고 부지에 맞춰 종횡으로 배치되었고, 신사택지의 건물은 장옥(長屋) 형태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되어 줄사택이라고도 불리었다.
해방 이후 미쓰비시 사택은 미군에 접수되었다가 1956년 토지소유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어 1960년대에 대부분 일반에 불하되었으며, 이후 부평역사박물관에서는 철거가 예정되었던 신사택의 건축 부재를 수습하고 전문적인 보존처리를 거쳐 전시하고 있다.
농경문화실에서는 전통시대 농촌의 사계절 변화 모습과 계절별 사용했던 농기구를 통해 전통시대 부평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으며, 전통시대 관혼상제 및 의식주 생활 문화와 관련한 유물을 통해 선조들의 일생과 지혜로운 삶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농사일과 집안일은 24절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절기란 일 년을 15일 간격으로 나눈 것으로 계절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따라 아들 중심의 가계 계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출산 전부터 남자아이를 기원하였으며, 출산 후에는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여자는 15세에 계례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았고, 이후 혼례를 치러 가족을 구성하였으며, 남자는 서당과 향교 등의 교육기관에서 학습했으며 과거를 봐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사계절이 분명하여 옷감의 재질이 다양하였고 의례복과 일상복이 엄격히 구별되며, 일반적으로 양반은 여름에 모시, 겨울에는 보온성이 뛰어난 비단과 고급의 가죽 털옷을 입었던 반면 일반 평민들은 여름에는 삼베와 목면으로 겨울에는 목면에 솜을 넣어 누빈 옷이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가죽옷을 입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지만 쌀은 모든 사람의 배를 채울 만큼 생산되지 않았기에 형편이 좋은 양반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였던 반면 대부분의 평민들은 보리와 조를 먹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조들의 삶 속에 놀이는 빠지지 않았으며, 농번기에는 두레를 조직하여 공동 작업을 하였으며 이때에는 농기를 앞세우고 꽹과리ㆍ장구ㆍ북ㆍ징 등을 치며 고된 농사일에 흥을 돋우었다.
양반들은 투호나 활쏘기를 사대부의 덕행을 수양하는 것으로 여겨 마을마다 이런 놀이를 하며 구성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며 자연과 어울려 놀이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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