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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충청도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 민속자료, 온양민속박물관

by kangdante 2019.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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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권곡동에 위치한 온양민속박물관은 한국인의 일생과 식생활주생활의생활을 비롯하여,

각종 민속공예와 민간신앙세시풍속 등 2만여 점의 민속자료 유물을 전시소장하고 있다.

 

실내 전시실은 한국인의 삶한국인의 일터한국인의 아름다움 등 3개의 상설 전시실과

기획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형적인 민속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전시하여 후세들에게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교육시키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한국인의 삶은 유교이념에 따라 아들 중심의 가계 계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아기가 태어나면 삼칠일이라 하여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으며,

백일과 일 년이 되는 날에는 큰 잔치를 열었다.

 

백일상은 백설기를 쪄서 큰 덩어리로 잘라놓고 쌀밥미역국정화수를 차려서 안방 아랫목에 놓아두었으며,

일 년이 되는 돌상에는 쌀국수과일 등의 음식을 차렸다.

남자는 남색 쾌자에 복건이나 호건을 썼고 여자아이는 색동치마 저고리에 굴레나 조바위를 썼다.

 

 

우리 선조들은 죽음에 따른 가족의 슬픔은 삼년상이라는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극복하고,

돌아가신 조상은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냄으로서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부모가 돌아가신 것을 큰 불효의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장례를 잘 치러 마지막까지 효도를 다하려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의관정제(衣冠整齊)라 하여 옷과 관모(冠帽)를 바르게 갖추는 것을

선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생각했으며, 인간생활의 의식주 가운데서 의복을 가장 으뜸을 여겼다.

 

우리나라 옷의 기본구조는 바지 또는 치마와 저고리였으며 그 위에 곧은 깃을 단 겉옷을 입었으며,

때때로 중국이나 몽골의 영향으로 외래 복식의 유행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였다.

 

 

 

우리의 전통 복식은 오방색의 원리가 담긴 색채와의 조화,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의 미감 등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선조들은 또한 자연으로부터 삼베모시명주와 같은 옷감과 염색재료를 채취해서

자연 친화적인 전통기법과 재료를 사용하는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따르는 생활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관모는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보다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해 썼으며,

둥글고 넓은 차양이 있는 갓은 상류층의 대표적인 모자이다.

 

그 외 사대부들이 망건의 덮개로 썼던 탕건(宕巾), 유생이 향교나 서원에 참배하거나 과거시험을 볼 때 썼던 유건(儒巾),

훈장이나 양반이 집에서 썼던 정자관(程子冠) 등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자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곡선과 직선의 조화로,

정자관처럼 선이 중첩되어 유려한 곡선을 만들며 말총과 대나무로 만든 갓은 둥글고 넓은 차양이 있어

빛이 비치면 은은하고 부드럽게 된다.

 

 

나막신은 굽을 높게 만들어서 진흙이나 빗물이 튀기는 것을 막기 위한 나무 신발이며,

목극(木屐)각색(脚濇)목리(木履)목혜(木鞋) 등으로도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나막신으로 통칭되었다.

 

목화(木靴)는 목이 긴 장화형태로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들이 관복과 함께 착용하였던 신발이며,

(()가죽금단(錦緞)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국상(國喪) 때는 백색 목화를 싣는다.

 

 

공예는 일상생활속의 살림살이에서 나타나는 만듦새와 꾸밈새로 우리 고유의 기술과 예술 감각,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쓰던 사람들의 소박하고 참된 마음이 담겨 있다.

 

공예재료로는 금속자개도자기 외에도 자연 속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짚풀덩굴나무말총종이

쇠뿔 등을 이용하였으며 생활 속에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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