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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궁궐17

잔설(殘雪)이 남아있는 창경궁(昌慶宮) 겨울산책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경궁(昌慶宮)은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생활공간인 내전(內殿) 궁궐이며, 처음 이름은 세종대왕이 상왕(上王)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었다고 한다. 창경궁 내에는 명정전(국보 제226호)을 비롯하여 홍화문(보물 제384호)ㆍ풍기대(보물 제846호)ㆍ관천대(보물 제851호)ㆍ옥천교(보물 제386호)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조선 중기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향 중층 우진각 지붕의 대문이며,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화문 왼쪽의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으며,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명정전.. 2022. 1. 5.
단청 없는 소박한 궁궐 건물,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서울 종로구 와룡동의 창덕궁 내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헌종 13년)에 지은 건물로 헌종(憲宗)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고 하며, 원래 창경궁에 속해 있었으나 근래에 창덕궁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낙선재(樂善齋)는 단청(丹靑)을 하지 않은 소박한 궁궐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 기와지붕이며, 보물 제17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락문(長樂門)은 낙선재의 정문으로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뒤로 낙선재가 있으며, 집 뒤로는 큰 석재로 쌓아 만든 화계(花階)가 있으며 굴뚝과 각 단의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며 조원(造園)이 조성되어 있다. 낙선재는 또한 상중(喪中)에 있는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던 건물이기도 하였으며. 상중에 근신하는 후궁들이 소박한 건물에서 예를 갖추는 법도를 지키.. 2021. 12. 29.
[서울여행] 서울 가볼만한 곳(조선궁궐 정전(正殿) 조선 500여년의 도읍지였던 서울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비롯하여 창덕궁ㆍ창경궁ㆍ덕수궁ㆍ경희궁 등 5대 궁궐이 있으며, 궁궐의 정전(正殿)으로 근정전(勤政殿)ㆍ인정전(仁政殿)ㆍ명정전(明政殿)ㆍ중화전(中和殿)ㆍ숭정전(崇政殿) 등이 있다. 1.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경복궁(景福宮)은 1395년에 창건한 조선시대 제일의 법궁(法宮)으로, 북으로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며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은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로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1405년(태종 5년)에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고 한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 2021. 2. 13.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공존하는 덕수궁(德壽宮)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德壽宮)은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궁궐이며,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구한말(舊韓末)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으나 고종(高宗)이 1907년에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長壽)를 빈다는 의미로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명문(光明門)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咸寧殿)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대한제국 시절에 건립되었던 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덕수궁이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들이 철거되면서 1930년대에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후 2018년에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광명문도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다... 2020. 12. 15.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은 경희궁(慶熙宮)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경희궁(慶熙宮)은 1617년(광해군 9년)에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가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5대 궁궐중 하나로, 처음 창건 때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경희궁은 원래 선조(宣祖)의 5남 정원군(定遠君)의 사저(私邸)였으나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말에 따라,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는 등 인조ㆍ효종ㆍ철.. 2020.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