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은 전통사회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생활 문화를
한국인의 하루ㆍ한국인의 일 년ㆍ한국인의 일생 등 3개의 상설전시실로 운영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3전시관의 ‘한국인의 일생’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에서 현대까지
한국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게 되는 주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이념에 의해 아들 중심의 가계(家系) 계승이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삼신할머니에게 자손번창(子孫繁昌)과 건강한 남자아이의 출산(出産)을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대문에 금줄(禁線)을 쳐 아이의 출생을 알리고 부정한 출입을 막았으며,
태(胎)를 태항아리나 깨끗한 곳에 묻거나 불에 태워 아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출산 후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후에 백일잔치를 열어 비로소 축하하고,
백일ㆍ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무사히 성장한 것을 축하하였다.
오늘날에는 출산과 산후(産後)의 금기와 의례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이념과 가치관 등의 변화로 인해 남녀 성별에 관계없이 백일과 돌잔치를 열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관습은 이어지고 있다.
성년식은 아이가 자라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로 시대와 계층ㆍ성별마다 달랐으며,
조선 양반가에서는 중국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영향으로 남자는 관례(冠禮) 여자는 계례(笄禮)라는 성년식을 치렀다.
남자는 20세 전후에 집안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틀고 갓 등을 차례로 쓰며, 성인 이름인 자(字)를 받는 관례를 행했으며,
여자는 15세 전후로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계례를 행하였는데 일반적으로 혼례로 성년식을 대신하였다.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여자는 15세 전후에 계례(笄禮)를 치러 어른으로 인정받았으며,
혼례(婚禮)를 통해 가족을 구성하고
남자는 관직에 나가거나 직업을 가져 가족을 부양하였으며 여자는 집안 살림을 관장하였다.
혼례는 비교적 간소화 되었지만 의례의 기본 구조와 의미는 변하지 않았으며,
혼례로 형성된 가족 이외에 가족은 구성과 개념이 다양해지고 남녀의 역할 구분도 점차 사라져간다.
혼례 절차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가족 예절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혼례 절차와 재래의 관행이 절충되어,
신랑이 신붓집에서 혼례를 행하되 당일 또는 3일 후에 본가로 돌아와 조상께 인사를 드리고 부모님께 폐백을 올렸다.
조선시대는 가족을 형성하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은 자식의 당연한 도리였으며,
가풍을 잇고 집안의 평안을 위해 남녀의 역할과 의무가 다르게 부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三綱五倫) 바탕으로 유교적인 윤리교육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으며,
국가에서는 효자ㆍ충신ㆍ열녀를 표창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남자는 서당에서 글 읽기와 쓰기 등을 배우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서 유교 경전이나 역사책을 공부하였으며,
여자는 집안에서 받은 한글 교육으로 문자 생활이 가능하였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지만 엄격한 사회제도와는 달리
법적으로는 과거시험(科擧試驗)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에서는 문관을 무관보다 우대하였으며,
신분과 남녀 성별에 구분을 두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일정한 지위와 직업의 범위가 달랐지만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사회 변화에 따라 직업 제한과 같은 구분은 없어졌다.
수연례(壽宴禮)는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잔치로 보통 회갑(回甲) 잔치를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집안 어른이 만 60세 생일이 되면 회갑(回甲)ㆍ환갑(還甲)이라 하여 수연례를 베풀었다.
조선시대 60세 이상은 장수를 뜻하였기 때문에 자손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겨
친척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생일을 기념하면서 수연례를 통해 효심(孝心)을 드러내었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점차 병에 자주 걸리게 되며, 조선 후기에는 병이 들거나 몸이 허약해지면 약방에서 치료하였으며,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보급되면서 병의 증상에 따라 침이나 뜸을 하고 약을 조제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일부 사람은 굿이나 부적(符籍)과 같은 주술(呪術) 등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병을 예방하거나 위안을 얻고자 하기도 하였다.
상례(喪禮)는 죽은 사람을 땅에 묻고 탈상(脫喪)하는 의례를 말하며,
사람이 죽으면 가족은 그 슬픔을 상례를 통해 극복하였고 돌아가신 조상에 대해 제사(祭祀)를 지냄으로써
자손의 번창과 친족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자식들은 돌아가신 이의 마지막 길을 화려한 상여에 태워 보냈고,
내세(來世)를 위해 생활 용기로 쓰일 명기(明器)를 함께 묻기도 하였으며
유교적인 윤리에 따라 삼년상을 자식의 도리로 여겼다.
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고 때마다 추모하는 의례이며,
조선시대에는 집안에 사당(祠堂)을 짓거나 벽감(壁龕)을 만들어
조상이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을 최고의 효(孝)로 여겼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문화 또한 시대의 흐름과 생활환경에 따라 형식과 절차 등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조상을 기리며 후손의 안녕과 가족의 화합을 꾀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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